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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거룩한 경전’이라고 한다.
사전에 보면, 경전은 “변하지 않는 진리와 도리를 써놓은 책”이라고 되어 있다.
성경은 이름에서부터 특별한 책이라는 느낌을 준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거룩한 책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거룩한 책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인들 가운데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나는 목사였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전체를 여러 번 통독하였다.
물론, 많이 통독했다고 성경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읽을 때마다 많은 모순된 점들을 보았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기뻤고 의문스러운 것들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이 하나님의 거룩한 책이고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요 신인(神人)이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보니, 성경의 진짜 모습이 보인다.
성경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으로서, 오랫동안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문자화되어 율법서(토라)와 예언서와 성문서 등 모두 39권으로 된 것이다.* (카톨릭은 외경 7권을 포함함.)
이는 A.D. 90년경 얌니아에서 유대 랍비들과 학자들의 회의에서 정해진 것으로 교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새로운 언약으로 A.D.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27권이 정해진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기본 바탕으로 한 것이다.
구약성경 처음에는 천지창조와 자연의 모든 동식물과 사람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2장 7절에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 남자를 만들었다가 나중에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게 보여, 남자의 갈빗대 한 개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다.(창세기2:22)
왜 남자는 흙으로 만들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을 몰라 처음에 남자만 만들었는가?
동물들은 처음부터 암수를 함께 만들었는데, 왜 남자와 여자는 같이 만들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야기를 지어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짝이 되어야 하지만, 여자를 남자의 부속품 정도로 생각하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이야기다.
창세기 3장에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어 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도 나온다.
창세기 4장에는 아담과 하와의 맏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다.”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신화적인 이야기다.
선악과니 생명나무의 열매니, 나중에 뱀이 저주받아 팔다리가 없어져 배로 기어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 어찌 신화적 이야기가 아닌가.
또, 거인 족 이야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 모든 족속의 언어가 다르게 된 바벨탑 이야기 등이 나온다.
이러한 것은 동굴 속에서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단군신화나, 박혁거세나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우리 민족의 신화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대부분 그 나라가 세워진 시조가 있고 전해 내려오는 신화가 있다.
구약성경의 앞부분 이야기도 그런 것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이야기와 인류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의 이야기 등을 사실처럼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그냥 상징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이 우주에 그중에서도 태양과 달과 별과 지구, 그리고 모든 생명과 인간이 탄생하게 된 이야기를,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만들었다고 유대인들의 생각으로 표현해 본 것뿐이다.
16세기 초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17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지구는 평평하고 끝에 가면 바다가 폭포처럼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든 해와 달과 별들이 가만히 있는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다.
17세기까지 이러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어찌 기원전 1000년경 사람들이 쓴 창세기의 신화를 어떻게 21세기에 와서도 사실적이요 절대적으로 생각하는가?
창세기의 이야기나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이상하게 해석하는 사이비 종교가 많다.
그냥 유대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글일 뿐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생각나게 하셔서’ 그렇게 쓴 것이라고 한다.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스스로 알아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일일이 말해주고 가르쳐 주는 방식과 인간들 스스로 알아가는 방식 중 어느 것이 더 수준이 높고 바람직한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을 하루같이’(베드로후서3:8) 보낼 수 있는 하나님이 무엇이 급해서 인간에게 일일이 가르쳐 주겠는가?
성경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는 것은 단지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창세기의 창조이야기, 에덴동산, 노아의 홍수, 바벨탑이야기 등은 대부분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 족속들에 의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유대인들은 주변 족속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하나님과 관계된 이야기로 변형시켰을 뿐이다.
이렇게 변형된 이야기가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다윗 왕(기원전 1000년 경) 이후에 문자화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민족의 시조를 아브라함으로 생각하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도 각기 따로 부족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이런 각각의 전승이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져, 아브라함의 아들을 이삭으로, 이삭의 아들을 야곱으로 만들었으며,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는 이야기를 만들어 요셉의 전승과 함께 이스라엘의 12족속의 기원을 엮은 것이다.
신학자들은 성경이 이러한 식으로 엮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목사나 신부들도 제대로 된 신학교에서 배웠으면 다 안다.
교인들만 모를 뿐이다.
구약성경은 팔레스타인 주변의 신화적 이야기와 유대인들의 역사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엮어,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선민(선택받은 백성)으로서 모든 족속 중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이다.
유대민족은 떠돌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생긴 족속이다.
그 후손들은 애굽에 갔다가, 모세와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어 출 애굽하여 가나안 땅의 여러 족속들을 몰아내고 정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과 가나안 땅에 있던 기존의 족속들과의 다툼은 계속되고, 이것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이다.
유대인들은 처음으로 사울을 왕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 다음에 다윗을 세워 강력한 왕국(B.C.1000년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B.C. 922~721년)과 남유다왕국(B.C. 922~587년)으로 쪼개졌고,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점령당하고 포로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 모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방 땅에서 오랫동안 포로 생활하면서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큰 소망이 생겼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메시아 대망사상(待望思想)이다.
마침내, 이방인 페르시아의 고레스 황제가 바벨론을 점령하자 포로 귀환령이 내려졌고, 유대인들은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B.C.538)
이때 이방인들도 구원받는다는 사상이 포함된다.
이런 식으로 유대인의 역사와 그들의 신앙이 혼합된 책이 구약성경이다.
신약성경은 예수의 탄생과 행적과 그 말씀을 담은 4개의 복음서와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사도행전과 나머지는 바울 등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들이다.
모두 다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의 바탕에서 쓴 글이다.
신앙고백은 어느 종교든지 다 있는 것이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든 이슬람교든 어떤 종교든 기적과 이사들이 있고, 성지가 있고, 신앙고백적인 이야기가 무수하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어떤 사실에 대해 개인적인 이해와 해석이 들어가게 되고, 구전으로 전해질 때 변형되고 과장되기 때문에 그대로 믿어 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기도원이 있는데 간증 거리와 기적 같은 이야기가 무수히 많다.
어느 무당이 하는 기도원에서는 뎅뎅 종만 쳐도 기적적인 치유가 수시로 일어난다고 한다.
기도원마다 병이 나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잠시 좋아졌을 뿐, 나중에 보면 다시 악화되어 죽어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죽은 자는 언제나 말이 없다.
나는 기독교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적인 이야기를 유대인들이 모아놓은 것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꾸며진 것뿐이다.
다 사람의 말이다.
다만 사람의 말 중에 진리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조금 있을 뿐이다.
기독교에서 성경은 예수에게로 촛점이 모아진다고 한다.
신약성경이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어 그렇지만,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탄생을 바라는 이야기로 예수에게 촛점이 모아진다고 한다.
물론, 유대교도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전혀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린다.
메시아는 원래 다윗과 같은 왕을 뜻하는데, 기독교는 메시아를 온 세상의 구원자요 신적인 존재로 바꾸어 버렸다.
이건 기독교인들의 신앙일 뿐이다.
신약성경이 기원 후 약 400년이 되어서야 정경으로 27권이 채택된 데에는 우여곡절이 많다.
그것을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다.
당시에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담은 복음서만 보아도 그 종류는 상당히 많다.
도마복음서, 히브리복음서, 애굽인복음서, 마리아복음서, 나사렛인들의 복음서, 니고데모복음서, 베드로복음서, 빌립복음서, 구세주복음서, 진리의 복음서, 원야고보복음서, 비밀의 마가복음서, 에비온파복음서 등이 있다. * (바트 D. 어만,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참조)
이런 것들은 나중에 정경을 정할 때 다 탈락했다.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마태, 누가, 마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만 채택되었다.
교회의 감독이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문제가 된다고 하는 것들은 다 탈락시켰다.
그 책이 교회 공동체에서 읽혀져야 했고, 사도적인 권위를 가져야 했으며, 예수를 일관되게 증거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성향의 것들은 다 무시되었다.
이것은 정경을 정할 때 네모난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들어온 것들만 선택한 것이다.
그 틀에서 벗어난 것들은 다 제외되고 폐기처분 되도록 하였다.
그 네모난 틀은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니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내용보다 그들의 신앙고백이 더 중요했다.
나는 예수를 최고로 깨달은 사람으로 본다.
그래서 예수가 한 말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왜냐하면, 거기에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성경 중에서 예수의 말씀이 들어있는 4개의 복음서가 가장 중요하다.
그 중에서 복음서 기자들의 설명은 중요하지 않다.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전하기 위해 책을 썼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수의 말씀 중에 가짜가 많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을 참고로 하여 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많은 부분 마가복음을 베꼈지만 예수의 말씀 자체도 기자(記者)들에 의해 변형되기도 하고 생략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도 예수가 한 말처럼 되어 있다.
이것들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사도나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말들을 예수가 직접 말한 것처럼 꾸며진 것이다.* (마태16:18, 18:17, 28:19 등등)
더욱더 문제는 어떤 것이 예수가 직접 한 말이고, 어느 부분이 복음서 기자가 첨가한 부분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는데 있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고, 거룩한 존재가 되고, 믿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내 말을 믿고”와 “나를 믿고”는 천지 차이다.
“나를 따르라.”와 “나를 믿으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교회는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는 말을 주로 수용한다.
나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믿고 예수를 따라가야 한다고 본다.
신앙고백적인 복음서 기자의 설명은 대부분 엉터리다.
예수가 한 말을 믿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어느 말씀을 믿느냐가 중요하다.
예수가 한 말에는 두 가지 대조적인 말이 있다.
하나는 “너희는 나와 똑같은 존재이고 하나님과 하나된 자들이다.”라는 뜻의 말이 있고,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요 심판주이니 나를 믿으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예수의 어느 말을 믿어야 할 것인가?
둘 중 하나는 예수가 한 말이 아니다.
어느 것이 더 타당성이 있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있다.
2000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후자를 택해서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실 후자는 예수가 직접 한 말이 아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가 직접 말한 것처럼 조작한 것이다.
후자는 단순하고 무조건 믿으면 되니까, 너무 쉽고 의타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은가?
전자는 너무 어렵고 벅차다.
“감히 내가... , 아무 능력도 없는데...”
하지만, 예수는 능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예수가 가진 영광과 기쁨을 함께 누리기를 바랄 뿐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무조건 순종하고 의지하며 축복이나 바라는 애완견의 차원을 원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순종을 바라고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는 존재인가?
축복을 주는 존재와 바라는 존재의 관계는 주인과 애완견의 차원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사는 존재라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개라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사람을 애완견으로 본다는 것과 같다.
더 이상 하나님과 사람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고 사람을 사람되게 하라.
성경은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서이다.
신약성경은 전체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앙고백에서 나온 글이다.
그 고백적인 이야기를 믿고 참 자유와 기쁨을 얻었다면, 이런 분들께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냥 계속 기쁘고 자유롭게 살면 된다.
그러나 나의 경험상, 내가 성경을 처음에 통독하고 얻은 기쁨과 자유,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것이 무한 기쁨이요 참 자유인 줄 알았으나, 한정된 기쁨이요 착각한 자유였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다.
기독교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하늘을 보면서 그것이 세상 모두인 줄 알았다.
그 교리로 칠해진 안경으로 밖의 세상을 보며 측은해 하며 끼리끼리만 어울렸고, 다른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해 왔다.
그리고 아주 자유로운 척 했다.
그러나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제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 전환이 필요할 때다.
성직자 코페르니쿠스는 당시 해와 달과 별들이 평평한 지구 주위를 돈다는 수천 년 동안 가져온 생각을 뒤집는 주장을 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이다.
이것을 함부로 말하면 자신은 매장당하고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 늙어 죽기 전에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천구(天求)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리고 그가 죽던 날 책을 받았다.
그 책은 70년간 금서로 묶였다.* (피터 러셀, “과학에서 신으로” p.34)
지금은 누구나 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을 안다.
지구는 평평하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하면 머리가 돈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사람은 이성을 가진 동물일 뿐이요,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죄인’이라는 수천 년 동안 가져온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분신이고 하나님과 하나다’라는 예수의 주장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전환이 일어날 때이다.
저 하늘 넘어 하나님이 우리를 쳐다보는 줄 알았는데, 내가 하나님이고 네가 하나님이고 모두가 하나님이라는 인식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다가 올 것이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다.
나는 성경을 볼 때 예수가 진정으로 하고자 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단, 복음서 기자의 신앙고백적인 설명을 무시해야 한다.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모든 말씀은 복음서 기자의 가필이다.
예수가 특별한 존재라는 뜻의 글을 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분명히 자신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요,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존재임을 여러 곳에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들은 이 책에서 계속 설명해 온 바이다.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오직 여러분의 판단과 선택에 달려 있다.
잘 읽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으로 좋은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다만, 아쉬움이 있군요.
예수의 말씀에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면,
성경을 쓴 사람의 사적 감정과 쓴 배경의 감정과 의도가 들어가 있더라도
구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냥 읽고 읽는자의 믿음에 따라 각자의 분량에 따라 믿음으로
들여 진다면 그것이 곧 구원의 길임일진데~~
예수의 가르침의 최고의 핵심은 '믿음' 에 있습니다.
예수는 구원에 이르는 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명확히 아셨지요.
자신이 알게 된 그 길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삶을 사셨고요.
자신이 알게 된 그 길을 한 단어로 요약하여 가르친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는 자가 곧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받아 들여 자신이 믿음과 하나가 될 때
그 때 비로소 자신이 구원 받았음을 알게 되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죠.
이는 누구의 말을 전해 듣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제 자신이 직접 체험을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이기에
이렇게 말씀 드릴수 있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때 구정선사 얘기를 적은 글이 있습니다.(자유 게시판)
글을 배운 적 없는 젊은 스님이 스승이 가르쳐 주는 말을 잘못 알아 들었지만
잘못 알아 들는 그 말을 스승의 가르침이라 굳게 믿고 따르고 수행한 바 깨달음을 얻게 되어
후일 구정선사가 된 이야기지요.
스승 왈 즉심시불이다 라고 하셨는데, 젊은 구정선사는 글을 몰랐기에 그 말뜻을 모르고
짚신이 부처라는 말로 잘못 듣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스승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짚신이 부처다 라고 되뇌이며 그 말을 뜻을 참구하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입니다.
좋은 말씀이지만 개인의 체험으로 볼 때 성경 말씀에는 분명히 구원의 길이 있음을 알기에
성경 말씀중에 잘못된 부분 그런 것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푸름이님
안녕하세요?
> 예수의 가르침의 최고의 핵심은 '믿음' 에 있습니다.
직접 체험에 의한 말씀이라고 하시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어떤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속에서 "이 말이 맞아! 이거야!"하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깨달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성경 말씀중에 잘못된 부분 그런 것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잘못된 말씀을 비유를 들자면
바른 길을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말씀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푸름이님의 견해는 존중합니다.
단지 저는 이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
브릿지님
반갑습니다.
쓸데없이 자꾸 님의 글을 어지럽히게 되는군요.
> 예수의 가르침의 최고의 핵심은 '믿음' 에 있습니다.
직접 체험에 의한 말씀이라고 하시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어떤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속에서 "이 말이 맞아! 이거야!"하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깨달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맞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깨달음.
위에 언급한 저의 체험은 바로 흔들리지 않는 깨달음이죠.
그렇기에 감히 댓글을 달 수 있었던 것이고요.
> 성경 말씀중에 잘못된 부분 그런 것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잘못된 말씀을 비유를 들자면
바른 길을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말씀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군요.
잘못된 말씀이란 의미는 잘못된 가르침을 뜻하는게 아니라
성경에 구원의 길이 있다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면
성경에서 그 길을 찾는 것이 믿는 자들의 믿음에 의해 찾아지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의지에 따른 믿음은 결코 그 길을 찾을 수 없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체험이고요.
의지라는 것은 결국 에고이기에 그렇지요.
우주 만물이 신안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주 만물 모두에는 이미 옳고 그름이 없겠지요. 있다면
그런 것들 모두가 인간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관념으로 구분될 뿐이겠지요.
신의 측면에서던, 진아의 측면에서던 구분해야 할 것도, 경계를 지을 것도 없음이지요.
감사합니다.
브릿지님의 견해를 존중합니다.
잠시 저의 체험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_()_
브릿지님, 반갑습니다!
나중에 시간날때 읽어야지 하고 그동안 차일피일 하였는데..
이번 글은 제목이 마음에 끌려 차분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나이를 만나기 전에..
성서신학을 통하여 성경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브릿지님의 통찰력에 감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나도 오래전에 성서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의 문제점을 깨닫고 마음에서 성경을 덮었었습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후에 신나이를 만나서 읽다가
성경에 관한 메시지가 내 생각과 매우 흡사한 것을 보고 무릎을 쳤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여기 한 푸대의 자루에 쌀이 60%, 모래가 40% 들어있다고 가정하고,
만약 쌀에서 모래를 가려낼 능력이 없다면.. 그것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래도 60%나 되는 쌀(진리)이 있으니까
먹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을 먹게되면 맹장염에 걸려서 죽을 확률이 매우 높고,
지금 기독교인들이 보이는 실상이 그렇다고 보고 있습니다.
더구나 성경의 각권은 앞뒤 연결성이 거의 없음에도
요한계시록에 있는 "일점 일획도 가감하지 말라"는 한 귀절을 가지고,
창세기부터 66권을 금과옥조처럼 만들므로써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출애급 과정에서 모세나 여호수아 등 사사들을 시켜 이방민족을 몰살하고,
심지어 가축조차도 몰살하게 만드는 신을 지금의 하나님이라고 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전쟁과 살인도 서슴치 않고 있지요.
그런 터무니없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성경을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말라는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목회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신도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데..
브릿지님의 글이 거기에 작은 균열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두더쥐가 파놓은 작은 구멍이 커다란 뚝을 무너뜨릴 수도 있듯이..
이런 작은 균열이 인류가 "내일의 신"을 맞이하는 도미노가 되리라고 봅니다.
브릿지님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랑과 감사로....리멤버![]()
안녕하세요 ^^
알곡과 모래의 비유를 어디서 들었다고 생각되는데
오래 전에 리멤버님의 쓰신 글에서 보았던 것 같군요.ㅎ
훌륭한 비유입니다.
전에 바닷가의 죽은 새들을 해부한 사진을 보니
쌀알 같은 스트로플이나 플라스틱 등이
위 안에 가득한 것을 본적이 있지요.
어느 곳에도,
성경안에서도 진짜 같은 짝퉁이 있으니...
리멤버님의 응원에 감사드리며... ![]()
좋은글 공감하며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