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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似而非)란 말이 있다.
진짜와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말한다.
짝퉁(가짜)이란 말이다.
여러분은 사이비 입니까?
사이비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짝퉁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오.” 하고 답할 것이다.
“내가 왜 사이비로 살고 있어? 내가 짝퉁이라고? 나는 나로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살짝 기분 나쁘려고 해!” 할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나는 누구로 살고 있는가?
나는 권력이 있고 부자라고 스스로 높이며 으스대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못생기고 가난하다고 한탄하며 스스로 별볼일없는 자로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교수로, 변호사로, 의사로, 회사의 고위 간부로 스스로 엘리트로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키도 작고, 배움도 짧고, 특별한 재주도 없으니 스스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지금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건강한 남자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멋쟁이 연예인으로, 공부하는 학생으로, 평범한 늙은이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모두가 사이비로 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 나’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나는 지금 이러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참 나’(眞我)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지어진 ‘거짓 나’(假我)의 모습이다.
언제까지 ‘건강한 젊은이’로, 언제까지 ‘엄마’나 ‘주부’로, 언제까지 ‘인기 연예인’으로, 언제까지 ‘회사 CEO’로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것은 다 ‘거짓 나’의 모습이다.
생태적으로 사회적으로 잠시 만들어진 껍데기의 모습일 뿐이다.
‘참 나’가 아니다.
그럼 ‘참 나’는 무엇인가?
‘참 나’의 모습은 세상 만물의 근원의 신, 하나님이다.
우리는 ‘참 나’ 위에 각기 개성 있는 인간의 껍데기를 쓴 하나님이다.
모두가 하나님이다.
각각 하나님의 분신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망각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부모나 사회적 배경에 비추어 보고 자신을 정의한다.
그래서 ‘거짓 나’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진짜 ‘나’인양 착각하고 산다.
모두가 ‘거짓 나’로 살아가고 있으니,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이상적인 나라를 만든다고 했지만, 다툼과 분열과 전쟁과 집단 이기심이 가득한 세계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최고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종교(宗敎)도 마찬가지이다.
근본적으로 ‘나’에 대한 정의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정의가 올바로 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가 사이비로서 사이비 세계를 만들어 갈 뿐이다.
그런데 ‘참 나’를 찾아 새로운 세계를 이루며 살아갈 것을 선포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예수다.
내가 볼 때 예수는 단순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지난 2000년 동안 예수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 왔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호모우시안(homoousian,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에서 동일)이니 호모이우시안(homoiousian,비슷하나 다름)이니, 양자(養子)론이니 등등 영지주의와의 끊임없는 논쟁 속에 예수를 정의해 왔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을 모르고, 예수를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사람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은 사람이었다.
‘참 나’를 깨달은 사람이요, 진리를 안 자였다.
예수는 ‘참 나’의 존재가 하나님임을 알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과 하나임을 알았다.
이것을 모르면, 서로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빼앗고 죽이고 억압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는 외쳤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야! 율법에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지 않았는냐? 너희도 아버지와 하나된 자들이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고 하나님의 분신이야!”
“아버지와 하나된 이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아니?”
“이것만한 영광이 어디 있는지 알아?”
“이 영광과 기쁨을 너희들도 누릴 수 있어.”
그러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예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세상에나!”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이 어디 있어?”
“황당하네. 미친놈 아니야?”
“하나님을 모독하는 놈이네. 저런 놈은 정신병동에 가둬놓아야 해. 거기에는 스스로 하나님이라는 놈들이 많지. 그런데 지금은 정신병원이 없군. 할 수 없지. 돌로 쳐 죽여야 해!”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가족과 친지들은 예수를 미쳤다고 아예 내 놓았다.(마가3:21)
돌로 쳐 죽임을 당할 뻔한 적도 몇 번 있었다.(요한8:59,10:31)
예수는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다가는 얼마 못가 유대인들에게 잡혀 기어이 돌에 맞아 죽을 것 같았다.
제자들도 도대체 제대로 알아듣는 놈이 없었다.
예수는 방법을 살짝 바꿨다.
이제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기 보다는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하고, 실제로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했다.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해.”
“바리새인들처럼 껍데기로 살지 마.”
“그따위로 살아서는 반드시 그 대가를 받게 되어 있어.”
“너희는 어떤 존재인지 알아?”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야.”
“네 이웃? 네 원수? 다 하나님의 아들딸들이야.”
“그러니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네가 대접 받고자하는 대로 대접해.”
“누가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대 주고, 겉옷을 벗어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줘.”
“그리고 너에게 죄지은 자, 무한대로 용서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야.”
“하나님을 속이려 하지 말고, 또 너 자신을 속이지 마.”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 그것이 자라면 모든 새들이 깃들지.”
“하나님의 나라는 밀가루 속의 누룩과 같아. 다 하나같이 부풀어 똑같이 되지. 그리고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어.”
“하나님의 나라는 최상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아. 그것을 발견하면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사지. 그 기쁨이 어떤지 알아? 이게 나의 기쁨이야.”
“율법? 정결예식? 성전? 예배? 그런 건 중요치 않아.”
“네가 싫으면 무엇이든 하지 마.(도마복음6절) ”
예수는 자신의 본질인 ‘참 나’를 알고 있었다.
‘참 나’는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참 나’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참 나’를 아는 자는 ‘거짓 나’로 살 수 없다.
예수는 놀라운 능력도 있었지만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안식일도 개의치 않고 병자들을 고쳤다.
가장 멸시받는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다고 했다.
“화 있을찐저 바리새인들이여”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성전을 허물라고도 했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눈에 가시가 되었다.
따르는 무리가 많자 돌로 쳐 죽이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로마군에게 넘겨 죽였다.
그것뿐이다.
우리는 사이비로 껍데기 지워진 그 속에 ‘참 나’가 의연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거짓 나’는 명예와 권력과 재물에 혈안이 되어, 불안과 두려움을 만들어 갔을 뿐이다.
이 불안과 두려움이 사이비 세상을 만들었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삶과 목표도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보이는 것은 처절한 다툼과 고통의 소리 뿐.
지옥이 따로 없다.
예수는 이러한 사이비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을 가르쳐 주었다.
그 해결책은 ‘참 나’를 아는 것이었다.
‘참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들이고 본질상 하나님과 하나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거짓 나’로 살아왔으나 이제는 ‘참 나’로 살라는 것이다.
‘참 나’로 사는 것은 내가 세상의 주인으로, 내가 하나님의 분신으로 사는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과 동식물과 무생물까지도 하나님의 분신으로 보는 것이다.
진정으로 ‘참 나’를 알게 되면 ‘거짓 나’는 사라지고, 하나님과 하나됨의 영광과 기쁨이 넘치게 된다.
이 영광과 기쁨으로 사는 것이 ‘참 나’로 사는 것이다.
여기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것을 꿈꾸는 자가 예수였다.
예수는 ‘참 나’를 알고 ‘참 나’를 선포하고 ‘참 나’로 산, 우리 인간의 표본일 뿐이다.
‘참 나’는 하나님이요, 세상의 주인이요, 사랑이요, 능력이요, 자유요, 기쁨이다.
모두가 다 세상의 주인들이네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신의 아들들, 신의 딸들이 왜
이것 밖에 못 사나?